이토록 치밀하고 친밀한 적에 대하여 - 나를 잃어버리게 하는 가스라이팅의 모든 것
바야흐로 가스라이팅 시대,
당신은 오늘도 ‘가스라이팅’당했습니다
불과 1~2년 전부터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자주 목격되는 질문들이 있다. “저 지금 가스라이팅당하고 있는 거 맞나요?”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법 좀 알려주세요.” “혹시 이것도 가스라이팅인가요?” “가스라이팅도 고소 사유가 되나요?” 이 모든 질문이 가리키는 핵심은 가스라이팅이다.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는 어느 순간부터 각종 매체에서 언급되더니 이제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누군가가 용납되지 않는 말로 나를 공격하거나 설득하려고 할 때 엄한 표정을 짓고는 경고하듯 맞받아친다. “저 가스라이팅하지 마세요.”
이 경우에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게 적절할까?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현상이 늘어가고 있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상황이나 심리를 조작해 상대방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행위를 말한다. 일차적으로 상대가 조작을 행하고 그다음 당하는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의심하여야 이 가스라이팅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가해자는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의 기원이 〈가스등(Gaslight)〉이라는 범죄 스릴러 영화라는 사실에 비추어 이 행위가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처럼 특별한 사건이나 범죄행위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가스라이팅은 일상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도 연인, 가족, 직장 동료 등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말이다. 가스라이팅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욱 가까이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으며 자주 그리고 쉽게 삶을 침범한다. 비상식적인 상황에, 상대의 뻔뻔한 말과 태도에 반격하거나 저항하기보다 나 스스로를 의심한다면? 분명히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나를 탓하고 내 안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게 만든다면? 당신은 지금 가스라이팅당하고 있는 중이다.
왜 나는 그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가,
알지 못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가스라이팅’
가스라이팅에는 양 당사자가 존재한다. 먼저 상대방을 조종하기 위해 상황이나 상대의 심리를 조작하는 사람, 즉 가스라이팅을 가하는 사람인 ‘가스라이터(Gaslighter)’와 가스라이터의 조종에 반응하는 사람, 그럼으로써 정서적 학대를 당하는 사람인 ‘가스라이티(Gaslightee)’가 있다.
가스라이터는 상황을 바꾸거나 교묘한 말 한두 마디로 상대를 조종하거나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세뇌하기도 한다. 이때 가스라이팅에 걸려든 사람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 ‘정말 내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며,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기에 이른다. 가스라이터에게 의존하고 지배당하는 가스라이티는 관계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선택권과 자유의지를 잃어버린다. 결국 자기 학대나 무기력증 같은 정신적 질병이나 물리적 피해를 얻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조남주 작가의 단편소설 〈현남 오빠에게〉에서는 연인인 현남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한 여자가 나온다. 가스라이터가 잘하는 행동 중 하나는 ‘무의미한 싸움 걸기’인데, 현남은 여자에게 기억에 관해 사소한 싸움을 반복적으로 걸고 자신의 말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여자가 자신의 생각에 대한 신뢰를 놓아버리게 만든다. 여자는 두 사람의 감정이 극에 달하는 것이 두려워 늘 현남의 말을 인정하고 넘어간다. 드물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더라도 현남이 예민하게 군다며 면박 주는 바람에 의기소침해지고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저자는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의 ‘학습된 무기력’ 이론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개들을 두 무리로 나누어 전기 충격이 가해지는 두 상자에 따로 가둔다. 전기 충격을 멈출 수 있는 레버가 있는 첫 번째 상자에 갇힌 개들은 이리저리 날뛰다 전기 충격을 멈추는 법을 배운다. 반면 레버가 없는 두 번째 상자에 갇힌 개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없었다. 이후 개들은 작은 담만 넘어도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있는 상자로 옮겨지는데, 이때 첫 번째 상자에 있던 개들은 새로운 상자로 옮겨가자마자 곧장 담을 넘었고, 두 번째 상자에 있던 개들은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고통을 받아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부정적인 마음을 배워 어떤 시도조차 하지 않는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판단하지 않고 무턱대고 따라가다 보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 길의 종착지에는 손해 보고 이용당하는 삶이 있지요. 가스라이팅을 당하면 살아가는 삶이 아닌 살아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종국에는 내가 사라지는 삶을 살게 되지요.”
심리학이 단순히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삶에서 따뜻한 유용함을 발휘할 수 있게 전하려고 노력하는 심리학자 신고은은 이 책을 쓴 배경에 대해 이렇게 썼다. 알지 못하면 당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알아야 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말이다.
가스라이팅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남을 탓하고 책임을 전가하기가 쉬운 가혹한 현대사회에서는 사방곳곳에서 이 잔혹한 가스라이팅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 당하는 개개인은 자신이 이상하거나 불편한 사람은 아닌지 의심하고 문제를 바로잡는 일을 포기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목소리를 잃어가”며 이것이 바로 “사회를 병들게 하는 가스라이팅”이라고 지적한다.
이 사회에서 가스라이팅은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어 주위로 퍼져나가고 세대를 이어 되물림되는 독성 강한 사회적 전염병으로,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서로를 가스라이팅하면서 상처를 전염시키는 것이다. 개인이 스스로 깨닫고 예방하고 회복하고 함께 연대하지 않는다면 해독되지 않는 사회적 독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드라마, 소설 속 사례에
심리학 이론을 더해 분석한 가스라이팅의 모든 것
이 책은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또 다양한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볼 수 있도록 영화, 소설, 드라마 등 익숙한 콘텐츠를 사례로 차용하여 가스라이팅을 설명하고 있다.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수많은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스라이팅과 관련된 다양한 갈등과 연관된 목소리”를 담아냈고 여기에는 “우리 삶에서 스쳐간 관계를 돌아보고 앞으로 함께할 가치에 대해 사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1장 ‘오늘도 가스라이팅’에서는 가스라이팅의 다양한 상황을 살펴본다. 우리의 삶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 보이는 영화 속 사건부터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상황, 그리고 ‘이것도 가스라이팅이야?’ 싶은 이야기까지 가스라이팅으로 들어가는 길목 언저리에 있는 내용은 모두 다뤘다. 2장 ‘가스라이팅 레시피’는 ‘도대체 가스라이팅이 뭐야?’라는 질문에 답을 내리고 있다. 상황을 조작하는 건 어떤 건지, 심리는 어떤 식으로 조작되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는 건 무얼 의미하는지 가스라이팅이라는 심리 현상을 자세히 분석하여 살펴본다.
3장 ‘치밀하고 친밀한 적 가스라이터’와 4장 ‘준비된 가스라이티’에서는 가스라이팅 관계 속의 사람들을 들여다본다. 가스라이팅을 가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의 특징을 심리학으로 파고들어 이런 사람이 가스라이터구나 하고 깨닫고, 가스라이팅에 취약했던 자신을 발견하거나, 심지어 나도 모르게 가스라이팅을 가했던 부끄러운 순간을 만날 수도 있다. 마지막 5장 ‘굿바이 가스라이팅’에서는 가스라이팅과 가스라이팅을 뿌리로 둔 다양한 갈등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 그리고 그때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