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한 장처럼 -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을 위한 이해인 수녀의 시 편지
살아갈수록 나에겐 사람들이
어여쁘게 사랑으로 걸어오네
아픈 삶의 무게를 등에 지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걸어오는 그들의 얼굴을 때로는
선뜻 마주할 수 없어
모르는 체 숨고 싶은 순간들이 있네
늦은 봄날 무심히 지는
꽃잎 한 장의 무게로 꽃잎 한 장의 기도로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오랫동안 알고 지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그들의 이름을 꽃잎으로 포개어
나는 들고 가리라 천국에까지
- 이해인의 시 〈꽃잎 한 장처럼〉
“살아 있으니 또다시 봄을 맞는구나
꽃들도 조금씩 얼굴을 보이기 시작하고……”
다시, 꽃으로 사랑을 노래하다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 등등 이해인 수녀가 펴낸 책 제목에는 꽃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 있다. 이해인 수녀는 이번 책 제목에는 꽃을 피하려고 했지만 요즘 마음에 담고 있는 꿈, 하고 싶은 말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시가 바로 〈꽃잎 한 장처럼〉이기에 책 제목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늦은 봄날 무심히 지는/ 꽃잎 한 장의 무게로/ 꽃잎 한 장의 기도로/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오랫동안 알고 지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그들의 이름을/ 꽃잎으로 포개어/ 나는 들고 가리라/ 천국에까지”라고 노래하는 이 시에서 우리를 향한 이해인 수녀의 무한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힘든 사람부터/ 사랑해야겠다
우는 사람부터/ 달래야겠다
살아 있는 동안은/ 언제 어디서나
메마름을 적시는/ 비가 되어야겠다
아니 죽어서도/ 한줄기 비가 되어야겠다
- 이해인의 시 〈비 오는 날의 연가〉 중에서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아직 살아 있음의 기쁨으로
이해인 수녀는 후배 수녀가 들려준 이야기로 머리글을 시작한다. “제가 어디 가서 수녀님 이야길 하면 아직도 살아 계시냐고 물어요. 몇 년 전에 떠돈 가짜 뉴스 때문인가 봐요.” 1부에 실려 있는 신작 시들을 보면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주제로 한 시들이 여럿 보인다. 〈거울 앞에서〉라는 시에서는 “아주/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니/ 마음은 아직/ 열일곱 살인데/ 얼굴엔 주름 가득한/ 70대의 한 수녀가 서 있네”라고 말하고, 〈꿈에 본 집〉에서는 “요즘은 자주/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사 간 이들을 생각하며/ 나도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될 날을/ 약간의 두려움 속에/ 그리워한다”라고, 〈행복 일기〉에서는 “행복한 이 세상을 두고/ 어떻게/ 저세상으로 떠날까/ 문득 두렵다가/ 그 나라에는/ 더 큰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하다/ 웃고 또 웃고……”라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시뿐만 아니라 에세이에서도 이해인 수녀는 죽음에 대한 사유를 여러 차례 풀어놓는다. “요즘은 힘들고 우울한 상황 때문인지 생시에도 꿈길에도 자주 죽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수녀원 마당에는 이제 라일락과 자목련까지 피고 부활 시기도 시작돼 흰옷 입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들리는 소식은 계속 아프고 슬픈 것들뿐이니 마음이 무겁고 답답합니다.” 하지만 이해인 수녀는 아직 살아 있음으로 해서 얻는 기쁨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다. 〈거울 앞에서〉는 “오늘도 이렇게/ 기쁘게 살아 있다고/ 창밖에는 새들이/ 명랑하게/ 노래를 하고!/ 나를 부르고!”라고 시를 마무리하고, 〈시간의 새 얼굴〉에서는 “시간은 언제나 살아서/ 새 얼굴로 온다/ 빨리 가서 아쉽다고/ 허무하다고 말하지 않고/ 새 얼굴로 다시 오는 거라고/ 살아 있는/ 내가 웃으며 말하겠다/ 날마다 일어나서/ 시간이 내게 주는/ 희망의 옷을 입고/ 희망의 신발을 신고/ 희망의 사람들을 만난다/ 희망을 믿으면 희망이 온다/ 슬픔도 희망이 된다”라며 살아 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희망을 꿈꾼다.
오랜 장마 끝에/ 마당에 나가/ 빨래를 널다
처음으로 만난/ 햇빛의 고요/ 햇빛의 향기
하도 황홀하여/ 눈이 멀 뻔했네
다시 한번/ 살아 있는 기쁨/ 숨을 쉬는 희망
자꾸 자꾸/ 웃음이 나네
- 이해인의 시 〈햇빛 향기〉 중에서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드리우다
2부에는 일간지에 2019년 12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2년여 동안 연재되었던 글이 실려 있다. 연재 시기는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뒤덮어 팬데믹이 지속되고 있는 시기와 일치한다. 당연히 이해인 수녀의 글 속에는 코로나로 인한 우리 삶의 변화된 모습들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거리 두기, 자가격리 등으로 변화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글은 우리에게 함께하는 삶에 대한 깨달음을 준다. 이런 시기일수록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더욱 잘 느끼게 된다고 말하는 이해인 수녀는 “하루하루가 하나의 꽃밭이 되게 하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향기로운 웃음을 꽃피우려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깊은 인내와 강한 의지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살아갈수록 더욱 알게 됩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고맙다는 말〉, 〈편지〉와 같이 친구와의 우정을 주제로 한 시도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만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언제나 곁에 있어주었던 옆 사람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우리 그냥
오래오래/ 고맙다는 말만 하고 살자
이 말 속에 들어 있는/ 사랑과 우정/ 평화와 기도를
시들지 않는/ 꽃으로 만들자
죽어서도 지지 않는/ 별로 뜨게 하자
사랑하는 친구야
- 이해인의 시 〈고맙다는 말〉 중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장기화된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며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조언을 아까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은 햇빛 속에 살아서 사랑하는 이들의 눈을 마주칠 수 있는 기쁨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코로나19가 준 선물이라는 것이다. 행복이란 것은 거창한 데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해인 수녀는 언제 특별히 행복하냐고 묻는 질문에 매 순간순간이 설렌다고 답하며 자신의 삶을 ‘즐거운 궁리가 많아서 행복한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더 힘든 일이 오더라도/ 희망을 버리진 말아야지/ 오늘도 결심하면서
달콤한 허브 사탕 하나/ 입에 물고/ 창문을 여는
이 순간의 작은 기쁨을/ 어떻게 선물로 만들까
즐거운 궁리가 많아지네
- 이해인의 시 〈코로나19의 선물〉 중에서
봄을 알리는 향기로운 꽃잎 한 장처럼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줄 이해인 수녀의 글 모음
《꽃잎 한 장처럼》에는 순수시나 에세이가 아니라 이해인 수녀의 생각과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글들도 실려 있다. 3부에는 한반도 평화 기원 시, 천호동 화재 희생자 추모시, 세월호 생존자 격려의 글, 김대건 신부·구상 시인·박완서 선생·장영희 교수·헤르만 헤세를 기리는 글 등 다양한 기념 시와 글들이 실려 있으며, 4부에는 이해인 수녀가 일상생활을 기록하고 있는 일기 노트 가운데 2021년에 적었던 글들을 골라 실었다.
나태주 시인은 “이해인 수녀 시인님은 그 존재하심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위로와 축복을 선물하는 분입니다. 하루하루 우리의 삶은 얼마나 힘이 들고 숨이 가쁩니까. 둘러보아도 그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오지 않는 날, 다리가 팍팍한 날, 수녀님의 시와 글을 떠올리면 그래도 살아보아야겠다는 조그만 결의와 소망이 생깁니다”라고 말한다. 코로나19로 지치고 힘겨운 상황을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 우리에게, 봄과 함께 찾아온 《꽃잎 한 장처럼》은 계절의 변화로서 찾아오는 봄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봄을 되찾아 주는 희망 가득한 선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