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검은 공주님
어린 혜진의 눈에, 피아노를 잘 치는 한 살 위의 지호는 진짜 왕자님처럼 보였다.
고등학생이 된 혜진은 따돌림과 가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같은 학교의 학생회장이자 장래가 촉망되는 피아니스트가 된 지호는,
이제는 똑바로 바라보기조차 힘든 존재가 되어 버렸다.
혜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매일 창 밖에서 그의 피아노를 몰래 훔쳐 듣는 것 뿐.
하지만 지호의 마음은 어느 새 창밖의 소녀에게 향하고,
우여곡절 끝에 어른이 된 그들은, 이제야 오래 묵혀 둔 사랑을 시작하는데…….
어릴 때부터 이어져 온 순수한 사랑을 그린,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
***
“손, 잡아 봐도 돼요?”
“응?”
혜진이 불쑥 묻는 바람에 지호는 흠칫 놀라 되물었다. 혜진은 가만히 손을 뻗어 지호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리고 오래 된 상처를 손끝으로 더듬어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마치 죽어 버린 그의 손가락을 다시 살려내려는 것처럼.
지호의 마음이 끝도 없이 부풀었다. 급히 심호흡을 해야 했다. 자칫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동시에 지호는 절실하게 생각했다. 혜진을 집에 돌려보내기 싫다고.
어디든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서 밤새 함께 있고 싶다. 품에 꼭 끌어안고 잠들고 싶다. 그러면 십 년 넘게 시달려 온 불면증도 싹 사라질 것만 같은데.
하지만 마음은 말이 되는 순간 끝도 없이 가벼워진다.
‘오늘 밤 우리 집에 가서 잘래? 아, 다른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사랑하는 여자를 향한 절실한 감정이, 혀끝에 담은 순간 이렇게 노골적이고도 수상쩍기 그지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러니 말이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시인이 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며, 지호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혜진이 소중하고 또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