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역습 - 우리는 문명을 얻은 대신 무엇을 잃었는가
“우리 아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이
부모보다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저자, 크리스토퍼 라이언이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는 거짓말’을 파헤치고
우리가 잃어버린 ‘행복의 원형’을 찾는다
“인간의 역사는 진보한다.”
많은 사람이 이 말을 믿는다. 우리는 시끄러운 사람들을 피해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가 푹신한 소파에 누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도, TV를 틀어 원 없이 드라마를 볼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시간만을 위해 일주일에 5일을 즐겁지 않은 일을 하며 버틴다. 가족을 위해 산다고 말하는 이들은 정작 주말이 되어서야 가족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는데 이마저도 스마트폰 화면에 주의를 뺏기기 십상이다. 불안과 박탈감, 우울증은 현대인에게 감기처럼 찾아온다. 그래도 우리는 문명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동굴에서 잠을 청하며 생존 자체를 위해 살았던 문명 이전의 사람들보다는 훨씬 행복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자, 크리스토퍼 라이언은 이러한 믿음에 의문을 던진다. 정말 지금이 최선일까? 앞으로도 인간의 삶은 계속 나아질까? 그런데 왜 나를 비롯해 주변에 행복한 사람은 없는 걸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과거의 삶이 홉스의 말대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었는지 혹은 리처드 도킨스의 말처럼 ‘생존 경쟁’만을 위한 무대였을지 살펴보려 한다.
저자는 현존하는 수렵채집인의 삶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유발 하라리, 제레드 다이아몬드, 찰스 다윈이 내놓은 인류 역사에 대한 통찰을 근거로 들며 고대인의 삶이 우리 상상과 달리 그리 암담하지 않았음을 세상에 드러낸다. 수렵채집인의 삶은 평등주의와 이동성, 감사하는 마음이란 공통점을 바탕으로 설계된, 인간 본성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외려 1만 년부터 농업이 시작되면서 노동이 인간의 시간을 대부분 앗아갔고, 부의 축적으로 계급이 생겨나면서 지금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환경의 토대가 만들어졌음을 밝혀낸다.
물론 지금 와서 문명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과거의 이해를 토대로 미래를 설계하자는 것이다. 인류가 문명에 휩쓸려 나아가면서 우리의 본성에 꼭 맞는 삶에서 멀어졌음을 이해하고, 이를 우리 삶에서 어떻게 다시 구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책은 라코타족의 위대한 샤먼 검은고라니가 말을 인용으로 끝을 맺는다.
“세상의 힘이 작용하는 방식은 모두 원형이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와 별들도 공처럼 둥글다고 들었다. … 인간의 삶도 어린아이로 시작하여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힘이 작용하는 삼라만상은 모두 이런 식으로 순환한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할 뿐 아니라 명쾌하기까지 하다.” _잭 도시, 트위터 공동창업자·CEO
“이건 책이 아니라 혁명이다.” _닐 스트라우스, 《더 게임》 저자
“우리 시대 가장 흥미롭고 도발적인 사상가.” _요한 하리, 《물어봐줘서 고마워요》 저자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 _제시 베링, 《PERV, 조금 다른 섹스의 모든 것》 저자
“나는 이 책을 읽고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회복했다.” _아마존 독자 서평
발전이라는 탈을 쓴 문명의 맨얼굴
저자는 문명이 인류를 발전시켰다는 관념이 토머스 홉스의 이론에 기인했다고 말한다. 1651년, 홉스는 자연 상태의 인간 세상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었다는 사고 실험의 결론을 내린다. 문명화되지 않은 인간은 ‘고립되고, 곤궁하고, 위험하고, 폭력적이었으며, 수명도 짧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문명을 합리화하는 이른바 ‘영속적 발전론’의 토대가 되었고 여기에 빈부격차와 계급 같은 문명의 부산물을 합리화하는 맬서스의 ‘인구론’, 인간 본성의 이기적 면모를 강조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인류 역사가 점차 폭력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스티븐 핑커의 주장이 엮이면서 문명은 부정할 수 없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으로 자리 잡는다.
저자는 이들의 말처럼 문명이 인류에게 꼭 좋은 것이었는지 의심한다. 실제로 수럽채집인의 삶이 어떠했는지 살피기 위해 현존하는 수렵채집사회를 면밀히 분석했고 영속적 발전론자들의 예상과 달리 그들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평등주의를 발견한다. 평등주의는 우리에게 익숙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면과는 정반대에 있는 태도다. 저자는 현존하는 수렵채집부족인 !쿵족의 삶에서 발견한 한 장면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준다.
!쿵족의 누군가가 짐승을 잡으면 부족 남자들은 포획물이 한심하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렇게 뼈다귀밖에 안 남은 걸 끌고 가라고 우리를 여기까지 부른 거야? 에이, 이렇게 뼈밖에 안 남은 건 줄 알았으면 안 왔지.”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사냥 솜씨가 뛰어난 사람의 자만심을 누르기 위해서다. 만약 그가 자만심에 취해 두목 행세를 하고 특권을 요구하면 탄탄한 평등주의 체제가 조정 기능을 발휘한다. 자만을 보인 자는 농담과 조롱을 받고 여기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고립되며 더 나아가 죽음에 직면할 수도 있다. 수렵채집인은 문명을 옹호하는 자들의 예상과 달리 평등한 집단 구조를 유지하며 호혜적 관계 안에서 살았던 것이다.
보노보의 습성도 문명 이전의 삶을 예측하는 중요한 근거로 등장한다. 인간의 잔혹성을 믿는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드는 증거가 침팬지의 습성이다. 침팬지는 늘 집단싸움을 벌이고 강간과 약탈을 일삼기 때문이다. 이러한 침팬지가 인간과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고 유전자도 98% 일치하므로 침팬지의 모습이 인간이 자연에 노출되었을 때 모습과 흡사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의도적으로 보노보의 습성은 배제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보노보는 침팬지처럼 인간과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보노보의 습성은 침팬지와는 정반대다. 보노보는 보헤미안적인 뻔뻔함과 여유로움을 과시할 뿐 목숨을 노리는 공격 행위는 전혀 하지 않는다. 전쟁도, 살해도, 강간도, 약탈도, 유아살해도 없다. 보노보의 평화지향성은 침팬지의 잔혹성만큼 우리의 뿌리인 것이다.
문명은 우리가 간절히 바랐던 발명품이 아니다
영속적 발전론은 우리의 가장 지혜로운 조상들이 더 잘 살기 위해 농업기술을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저자는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의견을 빌려온다. “우리는 수렵채집생활에서 농업경제로 전환되면서 건강과 장수, 안전, 여가, 훌륭한 예술을 누리게 됐다고 배웠고, 이런 시각에 동의하는 세력도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기는 힘들다.” 유발 하라리가 농업혁명을 ‘역사의 최대 사기’라고까지 했음을 언급하며 《사피엔스》의 한 구절도 인용한다. “농업혁명은 분명 식량의 총량을 증가시켰지만, 늘어난 식량이 식생활의 발전이나 여가 시간의 증가로 이어진 건 아니었다.” 이들의 예측에 따르면 정착생활과 농경을 시작한 인류 앞에는 사회적 불평등, 집단들 간의 폭력, 유일신 종교를 권력 유지에 이용한 지배계급이 등장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문명은 왜 시작되었을까? 저자는 이를 한 사건에 비유한다. 2003년의 어느 겨울 새벽,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포도원에서 관광객들이 열기구에 타려 기다리고 있는데 돌연 바람이 휙 불어왔다. 관광객이었던 브라이언 스티븐슨이라는 스코틀랜드인이 엉겁결에 열기구 바구니를 붙잡았고 열기구는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즉시 손을 놓아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스티븐슨은 주저하다 6미터 이상 올라가서야 손이 풀려 추락해 죽고 말았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문명의 시작인 농업은 이처럼 의도하지 않은 계기로 시작해 어느새 되돌아가기엔 너무 늦어버린 선택이었다. 한 연구자의 말에 따르면 문명화는 ‘파국적인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나온 우발적인 부산물’이다. 생존이 힘들어진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최후의 도피처’로서 ‘문명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이 발견한 사실은 수십만 년 동안 인류에게 발전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고대인의 두뇌는 현대인의 두뇌보다 약간 더 큰 것에서 알 수 있듯 지능도 높았지만 그들의 삶은 변화가 없었다. 창끝이나 화살머리의 디자인, 매장 풍습, 장식 등에서도 그 변화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미미하다. 그들은 왜 그렇게 오랫동안 똑같은 삶에 붙잡혀 살았을까? 저자는 그들이 붙잡혀 살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삶이 편안했던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맞다면, 우리 선조들은 ‘발전’이 필요 없을 정도로 행복하고 편안했을 거라고 유추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