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정치, 직업으로서의 학문 : 현대지성 클래식 57
격변의 시대 독일의 학생·지식인들이
막스 베버에게 나아갈 길을 구하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학문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독일 자유학생연맹(Freistudentische Bund)이 주최한 ‘직업으로서의 정신노동(Geistige Arbeit als Beruf)’이라는 초청 강연에서 막스 베버는 대학생·지식인들과 이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제국은 11월혁명으로 무너지고 바이마르공화국이 새롭게 세워졌다. 독일의 대학생들은 이 혼란한 시국을 타개하기 위해, 그리고 합리화되고 탈주술화된 근대사회의 대학이 직업훈련소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정치와 학문이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 당대 존경받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에게 물었다.
모든 것이 변해버린 상황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학생들은 베버가 당시의 현안들에 대해 구체적인 입장을 표명해주리라 기대했다. 베버 역시 학생들의 열망을 모르진 않았지만, 정치적 사견보다는 일종의 ‘우문현답’을 내놓는다. 베버 특유의 절제된 언어로, 눈앞의 상황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조망하면서 변화하는 시대에 직업으로서의 ‘정치’와 ‘학문’이 갖는 의미를 피력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17년, 1919년 두 번에 걸친 강연의 연설문은 각각 「직업으로서의 학문(Wissenschaft als Beruf)」, 「직업으로서의 정치(Politik als Beruf)」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정치와 학문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카리스마를 지닌 정치가가 책임 윤리를 바탕으로 시대의 소명을 따라 사람들을 조직하고 국가에 부여된 강제력으로 과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혼란에 빠진 독일에는 반드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인 ‘예언자’가 등장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독일은 관료제가 지배해온 국가여서 이런 “예언자”를 배출할 여건이 되지 않았지만, 독일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바이마르공화국 체제가 들어서는 이 시점에는 영국과 미국의 정치조직을 독일에 접목시켜 예언자와 관료제가 조화를 이루는 국가를 구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정치의 책무와 달라서,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적 영감과 열정으로 모든 사실관계를 객관적으로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치관 중에서 어느 하나를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데, 이때 학문은 어느 가치관을 선택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없다. 따라서 학문의 책무는 특정한 정파적 견해를 제시하고 합리화하는 데 있지 않고, 여러 견해가 지닌 함의와 결과를 어떠한 편견 없이 제시함으로써, 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돕는 데 있다. 따라서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수행하는 학자는 정파적 이해관계를 따라 학문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100년 전 막스 베버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1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정치와 학문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아니,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는가? 그 자신이 시대의 예언자였던 막스 베버가 전하는 메시지는 급변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일으키고 예리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특히 직업으로서의 정치가는 ‘열정’, ‘책임감’, ‘시대를 읽는 안목’을 갖추고 대의에 헌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은 오늘날 사리사욕만 추구하고 무책임하고 무능한 정치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듯하다. 또한 직업으로서의 학자는 지적 정직성을 갖추고 주어진 소임에 충실해야 하며 정파적 견해를 뒷받침하는 도구로 학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경고 역시 여전히 탈주술화, 즉 합리화와 지성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학문의 진정한 역할을 돌아보게 한다.
이 책의 역자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베버의 문장을 가독성과 보존성을 모두 고려해 우리말로 충실히 옮겼다. 또한 독자들이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분문을 장과 절의 체계로 구분했다. 해제에서는 강연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역사와 사회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어 소개함으로써 베버의 사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이제는 우리가 이 책에 담긴 베버의 답변에서 현시대의 정치와 학문이 나아갈 길을 모색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