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발이
일석 선생의 수필 중 특히 초기의 작품은 소재의 선택과 수사修辭의 조탁彫琢에 세심하면서도 소박을 잃지 않는 묘미가 있다. 1930년대의 작품 〈둥구재〉 〈버러지 이제二題〉 〈청추수제〉 〈청추수제淸秋數題〉 〈하운夏雲은 다기봉多奇峰〉은 국문학도로서 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만만찮게 벼른 작품으로 안다. 당시 수필이 비로소 수필이란 이름으로 생산될 때, 특히 외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였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자칫 현학적인 한문체의 문장으로 흐르기 쉬운 흠을 고쳐 국문학자의 위치에서 새로운 문장의 경지를 일구었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의 초기 작품에서 나는 고시조와 당시唐詩가 풍기는 청淸과 아雅를 사무치게 느낀 것 같다. 그것은 선생의 성해聲咳에 접해 가르침을 받은 나로서 글이 바로 선생의 온용溫容과 함께 명석明晳과 정려精勵였고, 부끄럽게도 본 삼아 모작模作도 해본 일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선생은 해방 후 많은 수필을 발표하셨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강의하시고 수많은 학도를 길러내시면서, 여가로 치면 힘에 겨울 정도로 많이 쓰셨다. 덕분에 나와 같은 후학이 읽고 즐기며 맛볼 수 있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수월하게 쓰는 가운데 도를 이루셨다고나 할까, 한결 정미精微하고 쇄탈?脫하며 예리한 필치가 선생의 모습 그대로 행간에 약여躍如하다는 것이다.
1952년의 작품 〈딸깍발이〉는, 오늘날 한국의 인간상을 무엇이라고 하느냐는 문제의 답으로 선비를 들추는데, 간결한 문장 속에서 선비의 전모全貌를 묘파한 대표작이라고 하겠다. 선비의 자애자긍自愛自矜과 인의仁義에 뿌리받은 기개를 겨우 수만 단어를 가지고서 어찌 이다지 묘파할 수 있겠는가.
해학은 옛 선비의 자랑스러운 교양이었다. 시문詩文과 더불어 멋있는 생활태도가 선비의 독천물獨擅物이었다면, 〈호변號辯〉 〈오척五尺 단구短軀〉 〈칠불당七佛堂〉 〈기지機智 두 가지〉는 현대 선비의 새로운 가능성을 가늠하는 절창絶唱이라고 본다.
선생은 1960년대 이후 시대와 현실로 눈을 돌려 시평적時評的 혹은 문명 비평적인 소재를 많이 다루신 것 같다. 일찍이 불행한 시대에 조선어 연구라는 불행한 작업을 스스로 택하신 까닭도 미시적인 현실 적응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고, 그리하여 조선어학회 사건 등 옥고를 치르시고 해방 후에도 지조로써 몸소 후학에게 사람의 길을 가르쳐오신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선생이 보시는 안목에 비친 세태다. 외래 문물이 밀어닥치는 과도기에 변해가는 조국의 모습과 이에 대한 소감인 것이다. 〈낭패狼狽〉 〈눈을 의심한다〉 등은 은유와 직유를 섞어 경묘輕妙한 필치로써 읽는 사람에게 스스로 깨우치는 비결을 가르치는 작품이라고나 할까.
다음으로 역시 가장 비중 높은 글은 국문학 연구생 교육의 낙수落穗로서 부드러운 자세로 경청할 수 있는 글들이다. 선생의 강의와 논문은 가장 논리적이고 정밀한 학구적인 시범일 뿐만 아니라 문장 역시 또 다른 질서와 체재를 가지고 거의 같은 효과를 거두는 비결을 가지고 있다.
언어와 민족, 언어와 문화, 한자 문제, 국어 운동, 대학과 생활, 독서 등 광범한 분야의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또는 시민으로서의 발언일 뿐 아니라 수사적인 면 이외에 지식, 교양에 이르기까지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박학하면서도 소탈한 면, 육예六藝에 비길 정도로 심미적인 생애, 오늘날 선비의 산증인을 내세우라고 한다면 나는 일석 선생의 글을 정독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장 전통적이면서 가장 새로운 것을 직시하는 것이 오늘의 지혜라고 할 때, 선생의 글은 귀중한 문헌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