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야 구석의 채식식당
우리는 아무 경험도 없이 작은 식당을 열었다.
‘열정’이라는 비밀 레시피 하나만 가지고.
시부야의 명물이 된 비건음식점 ‘나기식당’ 시작은 마흔 넘은 아저씨의 무모하리만치 뜨거운 열정뿐이었다.
2년 안에 가게의 절반이 문을 닫는다는 도쿄에서 요리를 배운 적도 경영을 전공한 적도 없으면서 무려 10년간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나기식당’.
이 책에는 한 식당 주인이 음식을 통해 행복한 삶을 모색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 도서 소개
우리는 아무런 경험도 없이 작은 식당을 열었다.
‘열정’이라는 비밀 레시피 하나만 가지고.
해외에서 더 유명한, 시부야 외진 곳 반지하 채식 식당
일본 도쿄에서도 번화가인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와 하치코 동상이 있는 메인 스트리트 건너편에는 같은 시부야지만 좀더 차분한 분위기의 또 다른 시부야가 존재한다. 그 거리를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다 보면 반지하로 감춰져 애써 찾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작은 가게가 자리 잡고 있다. 이름은 ‘나기식당’. 바람이 불지 않아 잔잔한 바다의 모습을 일컫는 일본어 ‘베타나기(ベタ?)’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테이블도 몇 개 없는 이 작은 식당에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트립어드바이저나 론리플래닛의 추천을 보고 찾아오는 외국인부터 혼식을 즐기는 중년 남성이나 편안한 분위기의 식당을 찾는 여성들까지 고객층도 다양하다.
2년 안에 가게의 절반이 문을 닫는다는 도쿄에서 요리를 배운 적도 경영을 전공한 적도 없는 오다 아키노부 씨가 무려 10년 이상 ‘나기식당’을 계속 운영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 이면에는 경제적 실리적 마인드의 식당 운영 노하우가 아닌, 한 식당 주인이 음식을 통해 행복한 삶을 모색하는 과정이 숨어 있었다.
“죽은 동물의 고기를 나에게 먹일 건가요?”
‘나기식당’ 주인인 오다 아키노부 씨는 사실 식당을 열기 전까지 한 가지 직업을 길게 지속해본 적이 없었다. 버블 시대의 혜택으로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하지 않고 미국에 무작정 건너가 일본 음식점에서 하루 종일 튀김만 튀기기도 했고,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재즈바 바텐더나 레코드 가게 점원, 음악 잡지 기자, 인디레이블 운영과 라이브 공연 기획도 해보았다. 첫 직장을 그만둘 때 산 매킨토시 컴퓨터를 가지고 편집디자인과 잡지 편집 일을 프리랜서로 해보기도 했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에 대한 동경을 가진 그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작은 식당을 열기로 결심했다. 식당은 ‘채식’으로 차별화했다.
외국 뮤지션들의 라이브 기획을 맡을 무렵, 매번 식사 장소를 찾는 일이 곤혹스러웠던 경험에서 기인했다. 한 뮤지션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은 동물의 고기를 나에게 먹일 건가요?”
오다 씨는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닌, 삶 전반에서 ‘애니멀 라이츠’를 존중하는 외국 뮤지션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크게 감화하여 그 자신도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원하는 것이 아직 세상에 없다면 만들어 나간다. 이것이 DIY적 삶의 방식
가게 자리를 구하고부터의 일은 전부 오다 씨의 몫이었다. 전기 배선이나 수도 등의 전문적인 영역을 제외하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 없었다. 가게 인테리어를 구상하고, 기자재를 사고 타일을 붙이는 것은 기본, 메뉴 개발부터 재료 손질, 스태프 모집과 관리까지 모두가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돈만이 목적인 일은 아니었기에 해낼 수 있었다.
‘채식’이라는 지향점은 있었지만 가스가 2구밖에 없는 좁은 부엌에서 낼 수 있는 요리의 가짓수는 많지 않았다. 해외 투어를 따라 다니며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경험한 그는 나기식당만이 낼 수 있는 에스닉한 채식 요리를 스태프들과 함께 개발하여 선보일 수 있었다.
이렇게 그는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세상에 없는 일이라면, 내가 지금부터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신념이 그를 지금까지 이끌어 왔다.
“매일 일할 수는 없습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만 나와주세요.”
나기식당은 미슐랭으로 대표되는 최고의 식당이 아니라,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찾아가고픈 대중 식당을 지향한다. 이 지향점은 공기처럼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자연체의 식당을 만들어가는 힘이 된다.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나기식당의 직원들은 대부분 뮤지션이거나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오다 씨는 그들이 이 식당에 전력을 다하지 않기를 바란다. 매일 일하는 무거운 공간이 되기보다는 다른 중요한 일을 꿈꾸며 즐기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이곳은 직원들이 몇 달씩 투어를 돌고 오거나 오다 씨 자신이 아내의 병간호로 자리를 자주 비웠을 때도 평소처럼 유지될 수 있었다. “매일 일할 수 없는 식당”은 위급한 순간 꽤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 추천사
이 책은 저자가 아주 사소한 계기로 ‘채식’에 눈을 뜨고, 도쿄 시부야에 가게를 열게 된 ‘채식’이라는 삶의 방식을 써내려갔다. 원래 채식주의자가 아니던 저자의 경험담인지라 베지테리언에 대해 잘 모르는 초보자도 알기 쉽게 쓰였다. 가게 운영 분투기는 앞으로 가게를 창업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메뉴를 만드는 법도 자세히 나와 있어서 채식 레시피 책으로도 활용 가능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 식당 주인이 음식을 통해 행복한 삶을 모색하는 모습이다.
_ 《아마카라 테쵸》
시부야의 한 켠, 우구이스다니 초에 내세울 경험도 없으면서 채식주의자를 위한 ‘나기 식당’을 창업한 저자가 시행착오에 시행착오를 거치며, 사람들이 몰려가는 장소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작은 가게를 만들고 지켜 나가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_ 다케다 사테츠(작가), 《선데이 마이니치》
보통 고집과 신념은 타인을 배제시키는 요소다. 그런데 오다 씨의 고집과 신념은 왜인지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읽을수록 음식 냄새와 그 냄새 안에 떠다니는 손수 만든 공간, 또 그 공간을 만들기까지 걸린 시간이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리고 책을 손에서 놓은 순간, 나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진다.
_ 호소마 히로미치(시가현립대학 교수)
2년 안에 가게의 절반이 문을 닫는다는 도쿄에서 오다 씨는 요리를 배운 적도, 경영을 전공한 적도 없으면서 무려 10년간 장사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요리를 직접 만들어보는 열정, 각지의 채식 식당을 찾아가 먹어보는 집요함, 가게에만 얽매이지 않고 잡지 편집과 음악 앨범 제작 작업에도 손을 대는 자유로움이 오늘의 나기식당을 만든 게 아닐까.
_ 김민정(옮긴이)
◎ 책 속에서
한국어판 출간을 결정한 이래 조금씩이지만 한국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 한국어도 더듬더듬 읽어보고, 이런저런 한국 문화를 직접 보고 듣고 맛보려고 노력 중이다. 큰 문화 전체를 이해하지는 못해도 서로의 ‘작은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며 많은 이들이 서로 소통하고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6쪽, 한국어판 서문 중)
누군가는 내가 강한 의지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먹는 행위를 좋아하고, 요리하는 행위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식당을 열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그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어슬렁어슬렁 걷다 보니 흘러흘러 지금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는 메인 스트리트를 벗어나 어느새 좁디좁은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Walking on the narrow side. 좁은 길을 가라. 나에게는 틈새 시장을 찾으라는 말로 들린다. 틈을 의미하는 한자인 隙틈극에는 ‘겨를’이나 ‘짬’의 뜻도 있다는 것을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해가 들지 않는 좁은 길에서도 나는 어둡다고 투덜대기보다 스스로 가로등을 하나씩 밝히며 걸어왔다. (13쪽)
가장 사랑하는 교토를 떠나고 싶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교토라는 도시에 대한 애증이랄까. 술을 마시러 가면 대학생들이 있고, 이전에 대학생이었던 사람들이 있고, 그보다 더 전에대학생이었던 사람들이 있고, 그 이전의, 그 이전의…….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모라토리엄이 계속되는 바 카운터. 그리고 그 저편에는 너희의 고민을 다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늙은 남자가 앉아 있다. 그 남자는 아마 좋은 사람이겠지만, 지긋이 있지 못하고 젊은이들에게 설교를 시작한다. 옆에 앉은, 아주 오래전 대학을 졸업한 듯한 사람에게도.
“젊을 땐 좋아도…….”
그 설교와 조언은 대체로 일리가 있다. 하지만 듣고 있는 젊은이의 가슴은 불안감으로 차오른다. ‘여기에 머물러 있다간 나도 저런 어른이 되겠구나’라는.
젊은이들에게 충고하기 좋아하는, 점잖은 체하는 어른이 되는 일은 단연코 씁쓸한 일이다.
(37~38쪽)
만일 지금 내 눈앞에 나처럼 대책 없는 남자가 서 있다면, 그 남자가 서른 살 나이에 퇴사를 선언한다면 나는 그에게 뭐라고 할까?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라고 설득할 것이다. “프리랜서도 좋지만 당장 일감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회사에 다니면서 대책을 마련한 다음 천천히 그만둬도 늦지 않아.” (51쪽)
‘일’이라는 명목으로 일하는 것이 싫어서 회사를 그만두었는데, 프리랜서가 되어 먹고살려니 하기 싫은 일도 해야만 했다. 이게 웬 모순이란 말인가. (55쪽)
데임 다시는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난 비건 채식주의자다. 내가 뉴욕에서 살 때 그곳에서는 이미 비건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채식에 대한 편견도 없었다. 그런데 비건과 함께 도쿄에서 지내보니 도쿄는 채식주의자에게 친절한 도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데임 다시와는 짧은 영어와 온갖 제스처를 동원해 이야기했다. 그래도 가끔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의사소통보다 더 큰 문제는 식사였다.
“그럼 오늘 저녁은 뭘로 할까요?”
이 질문 뒤에는 정적이 흘렀다.
“죽은 동물 고기를 나에게 먹일 건가요?”
그런 식으로 나를 몰아세웠다. (79~80쪽)
비건 생활 이전에 우리는 “최고의 소스는 계란 노른자”라고 의기투합한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가파오라이스 위에 얹어진, 노른자가 살짝 흐르는 반숙 달걀은 최고로 맛있는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여겨왔다. 무엇보다도 달걀의 부드러운 식감을 잘 살려 완벽한 요리로 탄생시킨 것이 오므라이스가 아니던가. 그런데 오랜만에 먹은 오므라이스는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렸다. 아내도 나도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 현실감을 일깨워 주었다.
사실 나는 비건 생활 중에도 ‘동물성 식품이 식물성 식품보다 훨씬 맛있다’는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 고기와 생선 먹기를 그만두었을 때 삶의 중요한 의미 하나를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까지 느꼈을 정도다. 그런데 오므라이스 사건 이후 그 환상을 말끔히 벗어버릴 수 있었다. 채식만으로도 결핍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98~99쪽)
그래, 그거야! 그런 식당이 없으면 내가 만들면 되지 않는가. 잡지를 만들 때도 그랬고, 레이블을 설립할 때도 그랬다. 해외 뮤지션을 초청해 라이브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이 다하는 것을 나 같은 문외한까지 나서서 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에 도전하고 싶었다. 나의 목표는 단순했다. 일본 최초로 저렴한 가격의 채식 식당을 만들자! 고매한 인사들을 위한 채식 식당에는 흥미가 없었다. 채식하는 외국 뮤지션이 낯선 땅에서 반갑게 찾아올 수 있는 곳, 또는 혈압이 높아 음식에 제한이 많은 고령자가, 고기를 소화하기 어려운 사람이, 개를 키우면서 육식에 회의를 느낀 회사원이, 유행을 따라 채식을 해보려는 사람이 찾아와 가볍게 한 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120쪽)
“아, ‘나기’가 있었지! 바람이 불지 않아 물결이 잔잔한 상태를 ‘베타나기ベた?’라고 하잖아.”
마치 방언처럼 입에서 ‘나기’라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는 일본의 경기가 지금보다는 나았지만, 그럼에도 묘한 폐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런 시대에 현대적인 화려함 따위 눈곱만큼도 없는 가게가 유행의 선두주자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가 가장 잘 알았다. 손님이 넘치지 않아도 좋다. 풍파 없이 조용히 운영할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사우다데saudade’도 매혹적인 단어다. 잔잔한 파도가 치는 바다, 고요한 그리움과 절실함을 드러내는 단어다. 하지만 아주 작은 파도조차 일지 않는 ‘베타나기’가 더 맘에 들었다. (124쪽)
우리 가게 가운데에는 ‘짜잔!’ 델리가 든 쇼케이스가 있다. 2호점에도 작은 쇼케이스를 들였는데, 가게 오픈을 앞두고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쇼케이스였다.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이 손님 취향대로 반찬을 고르는 대중 식당이었기 때문이다. 대중 식당이란 으레 쇼케이스가 있게 마련이다. 백화점 지하에 있는 반찬 가게, 샐러드 가게, 케이크 가게의 쇼케이스를 떠올려보자. 그 안에서 행복의 기체라도 뿜어져 나오는지 그 앞에 선 사람들은 모두 밝은 표정이다. 쇼케이스 안의 맛있는 음식을 뚫어지게 바라볼 때 느끼는 그 행복을 포기할 수 없었다. (134쪽)
오픈 직후에 일안반사식 카메라를 가져온 손님이 있었다. 다른 손님 의자에 등을 부딪쳐가며 사진을 찍어댔다. “사진 촬영을 그만해주세요”라고 했더니 “블로그에 올릴 거예요”라며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다. 이런 얼간이 같은 대답이 또 있을까? 블로그에 올리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걸까? 사진 찍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자유롭게 촬영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 가게의 요리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을 수준의 요리는 아니지 않은가.
나로서는 따뜻한 요리가 식기 전에 먹어주었으면 싶다. “사진도 못 찍고 다 먹어버렸네”라며 다 먹고 난 빈 접시를 올리는 블로거에게 오히려 더 호감이 간다. (188쪽)
나는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음식점’ 같은 특별한 곳보다 일주일이나 한 달에 한 번 찾게 되는 곳을 원한다. 또는 일 년에 한 번쯤 갈까 말까지만 ‘꼭 다시 찾게 되는 음식점’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장소인지 되새기게 된다. 그것은 꼭 단골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소에 자주 또는 가끔 찾아가 편하게 식사할 수 있는 곳은 삶에 어떤 형태로든 활력을 준다. 그런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는 작은 증거다. 다음에 찾아갈 날이 당장 내일이 아니라 5년, 10년 후라도 상관없다. 누군가의 인생에 각인된 존재로 남는 것이 더 중요하다. (201쪽)
아르바이트 직원을 채용할 때 꼭 하는 말이 있다.
“매일 나오고 싶어도 매일 일하실 수는 없습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만 나와주세요.”
그래서 아르바이트 직원들 중에는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케이터링 사업을 하는 등 다른 일을 함께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207쪽)
매일 출근하지 말라는 이유는 또 있다. 식당 아르바이트가 생활의 전부를 차지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도 9년간 나기식당에서 일해왔지만,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있을 뿐 평생 채식 식당을 하며 살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도 내 안에서는 절반은 편집자라고 우기고 있다. 그렇게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 편안함이 운영자로서의 융통성과도 직결된다고 본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매일 같은 사람들과 일하다 보면 솔직히 지겹고 권태로울 때도 있다. 원래는 다른 꿈이 있는데 생계를 위해 식당에서 잠깐 일하는 정도로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나머지 시간에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자유롭게 공부하고 일해주기를 바란다. 일 년 내내 온종일 나기식당에서 일하다가는 정작 자신의 꿈을 위한 일은 조금도 못하고 후회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208쪽)
“네가 열다섯 살이 되면 우리 둘이 같이 여행을 가자. 어디에 가고 싶어?”
“음, 가고 싶은 곳은 많은데 지금은 아이슬란드에 가고 싶어.”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왜 아이슬란드냐고 물었다.
“아이슬란드에는 군대가 없대. 그래서 평화롭대. 범죄율도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래.”
나는 몰랐던 사실이다.
“그치만 아이슬란드에는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아.”
아들의 대답을 듣고 안도했다. 나는 아직 부족한 아빠지만 자식들은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으로 크고 있는 것 같다. (2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