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힐 회고록
탈냉전 이후 국제분쟁과 전쟁위기의
한가운데에 그가 있었다!
내전과 분쟁과 전쟁, 핵무기 경쟁을 끝내기 위해 슈퍼파워 미국은 보스니아, 코소보, 그리고 북한과 어떤 협상을 진행했나? 생명이 위협받고 국익이 충돌하는 외교현장에서 벌어지는 협상 주체들의 깊은 고뇌와 피 튀기는 논쟁!
최초로 5.18 광주묘역을 참배한 미국 대사,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이래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국인!”
“나는 용감했던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곳에 크나큰 존경심과 슬픔을 안고 왔습니다. 이분들이 늘 기억되고, 이들에 대한 기억이 늘 우리 모두에게 영감을 주길 기원합니다.”
2004년 9월 부임한 크리스토퍼 힐 대사는 9월 16일에 주한 미국대사로는 최초로 광주 5.18묘역을 방문하여 위와 같은 글을 방명록에 남겼다.
‘여중생 장갑차 사망사건’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및 MD 구축’ 등으로 반미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때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한 힐 대사는 기존 대사들과는 결이 다른 행보로 한국인들 속으로 파고들려는 노력이 남달랐다는 평가를 받았다. 힐 대사는 부임한 나라의 상황과 역사, 문화 등을 파악하여 현지 국민들의 정서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왔는데, 이러한 그의 공공외교(public diplomacy)는 한국에서는 ‘미 대사관 다음 카페 개설’ ‘한국노총 위원장 면담’ ‘진보적 시민단체 주최 토론해 참석’ 등의 구체적 행위로 이어졌다. 그 때문에 당시 정의용 국회의원은 “미국에 대한 비판을 단순히 ‘반미’라고 매도하는 미국 현지 정치인들과는 차이를 보였다”고 평가했고, 태미 오버버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부회장은 “내가 한국에 있는 18년 동안 거쳐 간 미국 대사 6명 가운데 그는 가장 짧은 임기였지만 가장 큰 족적을 남겼다”고 말했다.
8개월이라는 짧은 주한 미 대사 임기를 마친 힐은 이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로 자리를 옮겼고,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를 맡아 9.19 공동성명이 탄생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실제로 이 책에는 힐 대사가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 6자회담에서 보여준 과감한 대북접근법의 전모가 최초로 공개되어 있다. 9.19공동성명을 합의하기 위해 북한을 설득하고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를 풀기 위해 미국 재무부팀과 내부논쟁을 하며 북한과 협상해나가는 과정, 문제를 풀기 위해 북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치열하게 협상하며 중국을 설득해가는 과정, 그리고 한국과 공조 아래 6자회담 합의사항을 밀어붙이는 과정 등을 처음으로 세밀하게 공개해 외교사료로서 가치도 크다.
힐은 부시 행정부 아래서, 스스로 “내가 북한 차관보 같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국무부, 국방부, 백악관, 그리고 네오콘과 갈등을 겪었다. 그 와중에서도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지속하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의지를 보여주어 당시 ‘맥아더 장군 이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국인’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9.19 공동성명 이후, 2007년 북한 핵시설 폐쇄에 관한 내용을 담은 2.13합의가 도출되었고, 크리스토퍼 힐의 아이디어로 2008년 8월에는 영변 핵시설 냉각탑 폭파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해 12월 이후 6자회담은 재개되지 못했고, 북핵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힐의 주도로 진행된 6자회담과 거기서 발표된 9.19 공동성명은 앞으로도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기는 데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