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이 걸어 촛불을 만났다 - 최민희의 언론개혁 여정
언론운동가에서 적폐에 맞선 정치인이 되기까지
언론 바로 세우기를 위해 달려온 최민희의 삶
‘촛불 국민 언니’ 최민희는 이화여대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며 학생운동을 시작해 졸업 후에는 노동운동을 했고, 1970·1980년대 언론 탄압으로 해직된 기자들이 모여 만든 월간 《말》의 1호 기자·민주언론운동협의회 간사로 언론운동에 입문했다. 월간 《말》은 전두환 정권의 보도 지침을 폭로하기도 했다. 6월항쟁 이후 월간 《말》은 독립 매체로, 언협은 시민단체로 거듭난다. 이름을 바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에서 사무총장, 상임대표를 연이어 맡으면서 안티조선운동을 했고, 총선시민연대를 조직하여 선거 보도 감시 등의 활동을 했다.
‘언론운동의 대모’로 불린 최민희는 노무현 정부에서 방송위원회 부위원장을 하며 한미 FTA 때 방송 분야 협상을 주도하면서 우리나라 방송 시장을 지켰다. 이후 야권통합운동을 하며 정치에 입문하고 국회의원을 하면서는 미방위에서 활동하여 나쁜 종편 솎아내기에 힘썼다. 20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에도 방송 패널 활동을 하면서 더불어민주당 디지털소통위원장, 문재인 대선 캠프 디소위 수석부위원장을 하며 언론과 언론운동에 관심을 놓지 않았다. ‘조국 사태’를 맞아 관련 언론 보도의 문제를 목도하면서 권력이 돼버린 언론을 바로 세우기 위해 검찰개혁 다음으로 언론개혁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언론’을 다시 생각하게 한 ‘조국 사태’
촛불시민은 왜 진보 언론을 비판하나?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민정수석을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하자마자 언론과 야당은 각종 의혹을 쏟아냈다. 그것은 조국의 도덕성 문제 제기보다도 검찰개혁을 저지하기 위한 검찰의 조국 흔들기, 문 대통령 흔들기이자 선거제도 개편을 앞둔 수구 보수 세력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가까웠다. 특히 검찰발 보도를 사실로 확정한 듯 받아쓰는 데 있어 조중동이나 한겨레신문, 경향신문이나 다르지 않았다. 언론은 왜 그랬을까? 진보 언론은 왜 촛불시민들에게 비판을 받게 되었나?
최민희는 ‘조국 사태’ 관련 언론 보도에서 한국 언론 보도의 오랜 문제점들이 총체적으로 드러났다고 평한다. 디지털로 기반을 옮긴 구독 환경의 변화, 기자들의 취재 역량 약화, 언론이 권력(여기에서는 검찰)의 의제에 이끌려가는 형국 등이다. 수구 보수 언론들의 편파 왜곡, 이중 잣대, 정파적 흔들기 문제를 넘어서서 진보적 매체마저 단독 경쟁에 뛰어들게 되면서 보도의 소스를 재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받아쓰게 되고 급기야 모든 언론이 권력이 만든 의제에 빠져버리면서 수준 낮은 저질의 기사를 쏟아내며 한국 저널리즘의 실종을 고하게 된 것이다.
최민희는 엘리트 권위주의에 빠진 언론은 시대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의 개혁 또한 어렵다며, 언론개혁은 검찰개혁 못지않은 시대적 과제이기에 시민들이 나서서 검찰개혁 때보다 더 큰 촛불을 조직해달라고 주문한다.